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Come Back Home (문단 편집) == 일각의 비판? == 가출 청소년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마이너한 사회 비평 잡지에 실린 탓에 큰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물론 후술되어있듯 보는 눈이 적어 주목을 못 받았다기보단 설득력이 떨어져서 주목을 못 받은 것에 가깝긴 하다.], 당시 일부 [[운동권]] 인사들에겐 체제 순응적인 메시지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들 기준에선 집은 사회의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은 사회의 시스템에 순응하겠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다만 위에서 언급된 비판은 ‘집에 돌아간다’는 제목이나 가사의 결론을 침소봉대한 [[오독]]에 가깝다. 컴백홈은 부모와 자식 관계를 ‘제압’으로 표현한 점, 가족이나 관계 때문이 아닌 ‘(내가) 아직 젊기에’, ‘(내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등이 집에 돌아가야 하는 이유로 제시된 점, ‘(다른 누구도 아닌) 날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나’를 완성하겠’다고 다짐하는 내용 등 가사 전반에 걸쳐 '''체제 순응과는 명백히 거리를 둔''' 내용들로 가득하다. 애초에 가사 자체가 부모가 아무리 미워도 더 나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면 니 미래를 위해 일단 집에 돌아가라는 식의[* 어떻게 보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일단 (센 척 하기 위한) 폭력은 피하고 떠나라는 마이클 잭슨의 [[Beat It]]과도 비슷한 주제의식이 있다. 즉, 차악을 피하기 위해 최악을 선택하진 말라는 것.뮤직비디오 내에서도 가출한 주인공이 불량배들을 만나서 얻어맞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주 팬층인 청소년 '''안전'''을 우려하는 혹은 가정의 '''회복'''을 유도하는 얘기라 체제 운운하기엔 핀트부터가 좀 안 맞긴 하다. 이 곡이 발매된 1995년 당시의 한국 사회상을 고려하거나, 서태지 자신의 자전적인 얘기를 가사로 옮겼다는 언급[*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순간부터 데뷔하고 최고 연예인이 되어서도, 나아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할 때까지도 서태지는 기성세대들의 문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스스로 개척했다. 인생이 체제에 대한 항거 그 자체라고 봐도 될 정도.]에 비춰보면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나를 완성하겠다는 내용에 더 가깝다. 또한 위의 비판이 주목을 받지 못한 건 단순히 사회 비평지에 실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애초에 사회 비평지에 실려서 주목받지 못했다는 설명부터가 어불성설인데, 당시의 음악 평론은 음악 자체보다도 메시지에 주력하는 사회비평적 성격이 지금보다 훨씬 짙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 비평과 음악 평론이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던 상황이었다. 사회 비평가들이 음악 평론에 발을 걸치거나 가사 전문 평론가[* 이들 중에는 유명한 작사가 출신이나 운동권 출신도 다수 있었다. 아직까지 [[민중가요]]가 대학가를 최후의 보루로 삼아 대중들에게 어필하던 시절임을 상기하자.]가 따로 있었을 정도. 서태지는 그들의 대표적인 우상인 동시에 먹잇감이었다. 데뷔 초부터 [[X세대]]의 대표주자로서 사회 비평지에 조금씩 실리기 시작했으며, 3집 발매 이후에는 ‘의식있는 뮤지션’의 전형으로 진보 계열 비평의 단골 타겟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랬던 만큼 그의 가사를 다루는 비평은 한두곳이 아니었고, 당연히 컴백홈 가사의 체제 항거적 특징들을 잘 짚어낸 비평들은 당시에도 존재했다. 위에서 언급된 오독성 비평은 그런 이유로 설득력을 어필하지 못해 묻힐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마이너해서 묻힌 거라기엔 당시의 평론 수준도 적어도 가사쪽으로는 만만치 않았다. 여담으로 서태지의 가사에 대한 일각의 비판은 이 곡이 시초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운동권 측면에선 더 호평할법도 한 3집 수록곡인 [[서태지와 아이들 3집#s-5.2|발해를 꿈꾸며]]가 의외로 원조였다. 다만 운동권도 여러 갈래가 있다 보니, 이때는 일부 민족주의적 가사나 통일을 제국이었던 ‘발해’에 비유한 제목 등을 문제로 삼는 그래도 이해는 가는 수준이긴 했다. 물론 이때도 북한을 ‘갈려진 땅의 친구들’이라고 지칭한, 당시 아이돌 아니 대중가수가 대놓고 표현하기엔 놀라울만큼 파격적인[*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이 나온 94년은 여러모로 남북관계가 역대급으로 혼란스러운 한 해였다. 연초부터 전쟁 위기가 고조되다가 3월에 [[서울불바다]] 발언이 나오고, 이와 맞물린 북한의 핵 개발 위협으로 서울 시내 매장마다 각종 생필품이 동나기도 했다. 이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급 화해무드가 조성되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김일성이 사망하여 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되기도 하는 등 실로 롤러코스터 같았다. 그리고 김일성 사망 한 달 뒤에 나온 곡이 바로 <발해를 꿈꾸며>인데, 그 곡에서 서태지는 북한 주민을 ‘친구’라고 적은 것이다. 독보적 인기를 구가하는 대중가수의 이러한 시각은 당시 많은 인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서태지가 아이돌 수준을 넘어 '예술가', '문화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관점이라든지,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젊은 힘’들이 ‘모여서 손을 잡자’라는 방법론을 강조한 신선한 가사 내용 등에 대한 찬사가 주류긴 했다. 이후 발해를 꿈꾸며는 음악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